1.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땐 다른 많은 아이들처럼 무척이나 티가 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머리가 좀 굵어지면서, 그게 창피하다는 것을 알게 됐었던 것 같다.
실은 다른 사람들이 그런 걸 창피해 한다는 것을 알게 됐었다.
사실 티가 나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다.
잘하지 못하는데도 잘하는 줄 알며 티를 내는 것, 잘 못하고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티를 내는 것이 창피한 일이다.
못하지만, 스스로 못하는 줄 뻔히 알면서 재미있게 드러내는 것은 창피한 일이 아니고, 오히려 대단한 일이다.
어쩌면 진지해지면, 진지하게 티를 내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서더라도, 자기를 알고 나와 남이 즐길 수 있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나와 남이 즐길 수 있는지가 창피한 일인지, 그렇지 않은 일인지 나누는 좋은 기준이 될 테다.
2.
그런데 문제는, 나는 지나치게 진지했다.
진지한 자가 티를 내서 부끄럽지 않으려면, 완벽해야 한다.
완벽주의는 과도한 진지함과, 부끄러움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완벽주의자는 완벽을 모른다.
끊임 없이 노력하고, 연습하고, 시간을 들인다 하더라도, 부끄럽고, 창피하다.
3.
그래서 내가 오래도록 선택한 전략은 최대한 나를 숨기는 것이었다.
친한 사람들 외에서는 말을 줄였고,
말을 억지로 걸거나 싹싹해야 할 때는 정말 온힘을 짜내가며 겨우겨우 시간을 넘기곤 했었다.
그래도 그와중에 나는 티나는 것을 좋아했으니, 결국 순간순간 나는 내 본질을 들켜버렸고, 그때마다 다시, 몹시도 창피했다.
심지어 나를 가리려고 했던 행동이 도리어 다른 티를 내버리기도 했다.
자신을 가리려는 자가, 자신을 가림으로써 드러다고, 자신을 드러내려는 자가, 드러냄으로써 포커스 아웃이 되기도 하는 이치처럼
그렇게 됐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티내지 않는다는 것의 반댓말은 오직 침묵이라고 생각했었던 착오, 패착이었을지도 모른다.
4.
나는 내가 속할 집단도 그런 집단을 좋아했던 것 같다.
티가 나지 않음으로써 티가 나는 그런 집단.
지지리도 삽질을 하지만, 사실 좀 선명하게, 각지게, 경사지게 흙을 파지는 않거나 못하는 집단.
그런데 그런 집단의 내부는 그래서인지 진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쾌했던 것 같다.
그런 집단들도 종종 바깥으로 나가게 되면서 내부적으로 진지해질 때도 있고, 진지해져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기 마련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우리도, 바깥으로도 재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아가려는 얘기도 많기 마련이고, 그게 좋다.
삽질은 좀 티나게 하더라도, 재미없는 일자선 도랑을 파기보다,
굽고 휘어지고 몰아치며 종종 꼬이기도 하고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는 그런 도랑을 파는 삽질 같은 것 말이다.
5.
나는 요즘 다시 삶의 전환점 근방에 와 있고, 그래서 그 전환 이후의 삶을 종종 생각한다.
생존을 위해서는 티가 나야 할 테고, 생존을 위한 티는 진지해야 할 때가 많으므로, 어쩌면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러도 여전히 굽고 휘어지고 꼬이는 도랑을 파는 삽질을 했으면 싶다.
적어도 나 자신이 내는 티는
좀 더 솔직한 티였으면 좋겠고, 못하고 빈 구석이 좀 있지만 대체로 즐거운 티였으면 좋겠다.
얼마 전 참여한 지보이스 합창 공연을 끝내고, 우리는 잘했다, 라는 반응보다는 재미있었다, 라는 반응으로 가득 찬 웹페이지를 보며
살짝 절망하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진지해서 잘한 것보다, 우리와 관객이 재미있는 것이, 그렇게 티가 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된다.
6.
나가면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지만, 그렇다고 바로 사업이나 활동이라고 할 만한 일들은 아직 기획이나 아이디어 수준이다.
해 보지 않으면 어차피 아직은 알 수 없는 일, 움직여 보면서 경험하고 다듬어나가면서 배워나가고 변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지금 생각하는 것은, 티 내기보다는, 성과를 바로 내기보다는,
나와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할 수 있도록 움직이는 것.
너무 거창하게, 너무 진지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유쾌하게 하겠다는 것이 분노하지 않겠다는, 눈물을 피하겠다는 말은 아닐 테고,
특유의 진지함이 필요할 때에는 웃음기 없는 집중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 이 유쾌함을 위한 수단이 될 뿐.
느릿한 산책과 돌아다님을 좋아할 것이다.
돌아다니는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에 띄는, 티가 나는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나는 개구쟁이의 표정으로 즐거운 몸짓을 보여줄 것이다.
울면서 길을 가다 누가 말을 걸면, 펑펑 안겨 눈물을 쏙 빼다가 농담을 던질 것이다.
말을 줄이고 자신을 감추기보다는, 티를 내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수줍게 드러내는 것.
티를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것.
티냄과 드러냄은 이렇게 다른 것이므로.
티내지도 말고, 가리지도 말고, 길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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